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프로이센 공세 (문단 편집) ==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 == [[파일:Battle_Of_Königsberg_Begin.png]] [[파일:522580556.jpg]] 초토화된 쾨니히스베르크 시내. 그 위로 [[Yer-2]] 폭격기들이 비행하고 있다. 자신의 병력들을 지키려 했던 호스바흐와 라인하르트는 위치를 사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라인하르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지휘권을 양도한다. 그리고 잔존 병력들은 [[로타르 렌둘릭]] 지휘하는 '북부집단군'으로 재구성된 새 집단군에 배속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가 포위되면서 잔존 3기갑군 병력들과 20만 명의 독일 민간인들이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었다. 포위 공격으로 하루 배급량은 180그램의 빵으로 줄어들었고 민간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도시에서 계속 굶주리거나 소련군에 투항해 소련군의 자비만을 바라거나 비스툴라 석호의 빙판을 건너 필라우의[* 현재의 러시아 발티스크 지역이며, 러시아 해군 발트함대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 피난선을 찾는 것 밖에 없었다. '''즉, 소련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당했던 그대로 되갚아준 셈이다.''' 물론 그럼에도 피해 규모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찌보면 당연한데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3년간 지속되어 왔지만 쾨니히스베르크 포위는 길어야 3달이다.]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72-093-65,_Flüchtlinge_auf_Schiff.jpg]] 하루에 2,0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석호의 빙판을 건너 피난선에 탑승했다. 독일군은 포위된 다른 아군 병력들과 합류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소련군의 거센 공격 앞에 좌절되었다. 그러나 2월 19일, 제3기갑군과 제4군 병력들이 필라우로 가는 기동로를 간신히 개통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노획한 [[T-34-85|T-34]]들을 바탕으로 주요 거점들을 장악해 잠란트 반도[* 현재의 러시아 삼비아 반도 지역이다.]와 필라우 급항을 장악하고 있던 독일군 28군단과 연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5기갑사단 병력과도 합류했다. 이렇게해서 4월 까지 필라우와 쾨니히스베르크와의 육로를 개통해 유지할 수 있었고 필라우를 통해 들어오는 배로 보급을 유지하고 피난민들을 대피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속에 처한 독일군이었지만 쾨니히스베르크의 방어선 자체는 여전히 매우 단단했는데 [[윈스턴 처칠]]이 엄청난 요새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보불전쟁]] 이후 또 다른 전쟁에 대비해 1888년부터 건설된 15개의 포트들이 있었다. 이 포트들은 당시 열강들이 개발하던 대구경 포에 대비한 방호성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막강한 대전차 방어선도 구축된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이 방어망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어떤 지역에서는 킬로미터 당 '''250여 문의 곡사포'''를 배치할 정도로 막대한 포병과 항공 지원을 쏟아부어서 방어하는 독일군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안겨주기로 했다. 4일 간의 준비포격 후 1945년 4월 6일부터 소련군은 총공세를 개시했다. 소련군은 여러 지점에서 공세를 가해 최종적으로 독일군 부대들이 상호 지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곳곳에 고립시킬 계획이었다. 이미 독일군들은 사기가 꺾여 있었고 19세기에 지어진 강화 요새들도 소련군에 의해 돌파당하거나 패닉에 빠진 수비 병력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 방어선은 하루 만에 곳곳이 무너져버렸다. 2일 째가 되자 기상 환경이 좋아지면서 소련 공군이 독일군들을 정밀 폭격하기 시작했고 [[Il-2]]들은 반격하려던 독일군 병력들에게 사신이 되어 강림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포트 8 요새 수비 병력들도 결국 항복한다.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독일군 지휘관 [[오토 라슈]]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내 항복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히틀러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독일군은 낡은 장비와 급히 징집된 [[국민돌격대]] 병력으로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소련군은 항복을 재차 요청했지만 독일군 수비병력들은 이틀을 더 싸웠다. 4월 9일, 더 이상 전투할 수 없게 된 독일군은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라슈의 벙커로 소련군 대표단이 방문하면서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독일군은 4만 2,000명의 병력이 전사하고 9만 2,000명의 병력이 포로로 잡히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쾨니히스베르크가 점령된 이후에도 동프로이센 곳곳에 잔존한 독일군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4월 25일 이들마저 완전히 소탕되며 동프로이센은 완전히 소련군에 접수되었다. 도시의 80%가 소련군의 무지막지한 포격과 공습 앞에 파괴되었으며[* 이미 1944년 영국 공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폭격했는데 이때 받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련군의 공격까지 받게 되는 불운이 겹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소련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한 후 이 잔해들은 소련 각지로 보내져 레닌그라드와 같은 중요 도시들을 재건할 때 쓰이게 되며, 그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공원이 들어서거나 삭막한 소련식 건물이 자리잡게 된다. 그 결과, 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는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같은 몇몇 사례만 제외하고는 독일령 쾨니히스베르크 시절의 흔적이 사라진 상태이고, 유명한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일곱 개의 다리]]도 4개가 파괴되었다. 이 중 2개만 다시 지어져 독일 시절에는 불가능했던 다리 한번만 건너기가 소련 시절에는 가능하게 되었다.] 거의 전체에 해당하는 20만 명이 넘는 쾨니히스베르크 주민들은 소련군에 의해 동독 지역으로 추방당했다. 포위전 과정에서 멧게덴 학살로 불리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3,000명이 넘는 독일 민간인들이 복수심에 불탄 소련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하고 강간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